24.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돌아갈 시간이다'

'-은-----다'





25.

우주정거장에서 시내에 있는 호텔로 가려면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했다.

"셔틀정류장은 저쪽이야."

본즈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그가 이끄는대로 걸어갔고, 우리는 나란히 보도를 걸었다.
화려한 도시였다. 길거리에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기게가 쭉 늘어 서 있었고 극장과 레스토랑도 보였다.

"짐, 주위가 밝지만 이곳은 지금 저녁이래."

하늘을 올려다보자 보라색과 청록색으로 은은하게 물든 달이 떠 있었다. 그 옆에는 주황, 노랑, 연분홍색이 섞인 오묘한 빛깔의 또 다른 위성이 있었다.

길 건너편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가로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쯤인지 알겠지만 도무지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면 방금 전까지 우든호에서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죽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죽었는지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 깜짝할 사이에 우든호에서 이리로 올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라도 다시 살아난다면 모두에게 알려주어야겠다. 사후 세계는 아이리아 행성과 똑같이 생겼다고.

"저것 좀 봐봐."

본즈가 내 손을 꽉 쥐며 주의를 끌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해변이 펼쳐져있었다. 나는 무심코 해변으로 향했다가 본즈의 제지를 받았다.

"오늘은 호텔에서 쉬고 내일 낮에 다시 오자."
"....내일 낮?"

나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신기해서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은근슬쩍 배도 만져보았다. 10분 전만해도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이제 멀쩡하네. 만약 내가 지나치게 침착한 것처럼 보인다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실은 엄청난 패닉 상태였다. 머리가 백지여서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하는 게 어려웠다.

(나는 죽었어. 그 상처로 죽지 않았을리가 없어. 그런데 어째서 시간을 이동한 거야? 게다가 이번에는 더 미래로 간 것도 아니야. 이건 우든호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낮에 와야 피부를 태울 수 있지."

본즈는 깍지껴서 잡은 손을 돌리며 내 손등이 위로 가게했다. 본즈와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함선에 너무 오래 있었어."

이날 내가 저 말에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다행히 희미한 기억 속에서 몇 가지 문장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나는 너랑 달라. 햇빛 아래에 있으면 빨갛게 익기만 한다고."
"그래서 우리가 이걸 사야하는 거야."

본즈는 자신의 패드를 내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 오일."

나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달걀 모양의 다홍색 유리병 사진과 이 지역 특산품이라는 문구가 띄워져있었다. 본즈가 오일의 성분에 대해 말하는 동안 나는 상품을 취급하는 가게의 이름을 읽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그 가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별안간 가게를 찾아냈다. 그곳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고, 규모가 매우 작아 사람이 여덞 명만 들어가도 꽉 찰 것 같았다.

"저기 있네."

본즈는 내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활짝 웃었다.

"오, 저 가게야! 저기서 팔 거야."

우리는 가게까지 같이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정확히는 본즈가 멈추어서 나도 따라 멈추었다.

"왜 그래?"
"너는 여기서 기다려."

본즈는 가게 앞에 놓인 간판을 보며 질겁했다. 간판에는 '진열된 상품 중에 알러지를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이 포함된 향수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말과 함께 여러 가지 화학성분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중에 내가 알러지를 가진 성분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 가게에 들어가지 못했지, 참.

"금방 사가지고 올게."
"알겠어."

나는 본즈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조금 더 관찰하기로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도 해 볼겸.

그러니까....죽을만큼 다쳤지만 실은 죽지 않았고, 때마침 시간 이동이 일어나 과거로 돌아간 건가?.....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멀쩡해진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항상 육체가 아닌 정신만 이동했으니까.

"음......."

아무리 그래도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실 그것말고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도 없지만... 그리고 또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때 화면에서 보았던 문구는 무슨 의미지?

1.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2. 돌아갈 시간이다.

하나가 더 있었는데.... 의식을 잃는 바람에 읽지 못했다. 우선 알고 있는 것부터 살펴봐야겠다. 돌아갈 시간이라는 거야, 미래로 돌아가라는 뜻인게 뻔하지만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정말로 몰랐을까?"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깊은 구덩이로 훅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인기척도 없이 등 뒤로 다가온 거지? 나는 뒤돌아서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놈이었다. 이번에는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석이 확실했다. 대체 네 놈의 정체가 뭐야? 내가 이 부근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소름끼치는 메일 좀 그만 보내. 그리고...

"너 때문에 본즈가 죽을 뻔했잖아."

나는 놈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본즈가 셔틀에 타도록 유도한 사람, 너지?"
"맞아."
"내가 너를 죽도록 패면 안 되는 이유를 하나만 말해봐."
"진정하고 이것부터 확인해."

그는 주머니에서 신원증을 꺼내 화면을 켰다. 그의 사진과 직책을 확인하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

"스타플릿....협조 연구원?"

이 녀석은 스타플릿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연방 기관에 속해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함선에 탄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이녀석이 요크타운에서 보충한 인력이라면 내가 놓쳤을리 없었다.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함선에 타고 있었던 건가? 혹시, 본즈가 데려온 건가?

"이거 놓고 말해."

그는 주의를 돌아보라는 듯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거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멱살을 놓았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소중한 날이었다. 상부가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휴양지로 유명한 행성에서 휴가를 보내는 걸 허락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면 엔터프라이즈호 크루 전체가 즉시 휴가를 반납하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네 이름을 밝혀. 그리고 엔터프라이즈호 승선을 허가한 사람이 누군지 말해."
"내 이름이라면 이미 알고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이지?"
"음....이렇게 하면 알아보려나?"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과 코를 가렸다. 그 순간 갑자기 공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본즈와 함께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때 그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강렬한 햇빛이 그의 뒤에서부터 내 눈으로 들어와 시야를 방해했고, 나는 눈살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과 코가 무언가에 가려져 있었다. 아마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 같은 연구를 했던 동료야." 본즈가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기계였다. 그 기계는 코와 입을 가린 것은 물론이고 전선 같이 얇은 선들이 아래턱과 목을 뒤덮고 있었다.

"케빈."

내가 말했다.

"케빈 필립스. 본즈의 옛 동료...."
"드디어 기억이 난 거야? 우리 전에 악수까지 했었는데."
"당신이 왜...."

너무 혼란스러워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게다가 스타플릿 협조 연구원이라고? 나는 그제야 공원에서 마주쳤던 일은 막연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공원은 우리 집과 가까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집은 스타플릿과 가까웠다. 언제부터 협조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케빈은 연구 때문에 스타플릿을 드나들었으니 오다가다 한 번쯤 마주치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잘들어, 제임스 커크."

케빈은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친절하게 경고했지만 더는 아니야. 왜냐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너도 네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건 알잖아? 어서 돌아가."
"....그러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영원히 갇히게 될 거야."

그는 검지를 세우고 원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지나온 시간들을 돌고 돌기만 하게 될 거라고. 네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

목소리가 섬뜩했다. 그를 경계해야 하는 걸 알지만 거짓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나는 어떻게 시간을 거슬렀는지 몰라. 그런데 돌아가는 방법이라고 알겠어?"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꽉 잡더니 갑자기 코끝이 닿을 정도로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의 눈동자는 블랙홀처럼 짙었으며, 내 의지대로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돌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고."
"정말? 그러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이라면 우든호?.... 아니다. 케빈은 우든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맨 처음, 그러니까 내가 지진을 겪었을 때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은.... 본즈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를 사랑하던 본즈의 곁으로.

케빈은 나를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전부 한 사람과 연관되어 있어."
"....본즈?"
"그래."
"본즈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
"물론 직접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케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본즈가 가게에서 나와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 말을 기억해."

케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정말로 몰랐을까?"

케빈은 뒷걸음질 치다가 바로 옆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모습을 감추었다. 쫓아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본즈가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디가?"
"방금.... 못 본 거야?"
"뭘?"

본즈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 누구야? 누구랑 대화하고 있었어?"

나는 케빈이 걸어간 골목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나가던 관광객. 길을 물어보더라. 대답 못해줬어."
"하하, 네가 잘 알 것 같았나보다. 너도 관광객인데."
"그러게...."

본즈는 그만 가자는 듯이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셔틀 정류장이 바로 저기에 있어. 어서 가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한 사람과 연관되어 있어.' 케빈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던진 물음까지도. '네가 정말로 몰랐을까?'

내가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걸까?

다음날 오후, 나와 본즈는 계획했던대로 해변으로 갔다. 공기가 매우 축축해서 아직 물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걸을 때마다 발등부터 발목까지 붉은 모래가 달라 붙었다. 샌들이 아니라 장화를 신어야 했나.

2분 정도 걷자 해변에 놀러온 사람들을 위한 일광욕 의자가 일렬로 늘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의자 사이사이에는 오일 병이나 칵테일 등을 올려놓을 수 있을법한 작은 탁상이 있고, 의자 위에는 지붕처럼 커다란 파라솔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듯한 자리를 찾아 그 주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누워봐."

본즈가 손에 오일을 바르며 말했다. 나는 의자를 일자로 핀 다음 어서 발라달라는 듯이 엎드렸다. 그는 전문 마사지사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쓸었다. 전체를 다 발라갈 때 즈음, 은근슬쩍 수영복 바지를 살짝 내리더니 엉덩이 부근을 만졌다.

"저기요, 마사지사님? 그곳은 햇빛이 닿지 않을 텐데요."

본즈는 더 대담하게 손을 집어넣어서 엉덩이를 옆으로 쓸고 허벅지 앞쪽까지 건드렸다. 나는 몸을 뒤집어서 본즈의 팔을 찰싹 쳤다.

"정말 이러기야? 너무 엉큼한 거 아냐?"
"내 남편이 보통 섹시해야지."

나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너도 발라줄게. 이리 줘."

본즈는 오일을 건넨 다음 자신의 의자로 돌아가 엎드렸다. 나는 그가 내 등에 발라준 방식을 떠올리며 최대한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본즈."
"응?"
"뭐 좀 물어봐도 될까?"
"흠....하는 거 보고."

농담이 분명했지만 나는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본즈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당연하지. 무슨 일 있어?"

나는 오일 병을 탁상 위에 내려놓고 말없이 본즈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하마터면 네가 죽을 뻔했어.'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젯밤 호텔로 돌아간 뒤, 어쩌면 이 시간 이동에는 일련의 규칙이 있는 게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게 있가면 과거로 돌아가는 규칙은 무엇일까? 지진 속에서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우든호에서 그랬듯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할 수 있을뿐.

그렇다면 내가 과거로 돌아가는 계기가 '죽음'이 아닐까? 이번 시간 이동이 이전과 다르게 미래가 아닌 과거로 움직인 이유도, 원래는 미래로 이동해야 했지만 우든호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보다 더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나는 죽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데.... 좋아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도중에 죽지만 않으면 원래의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는 이유가 '죽음'이 아니라면? 나는 케빈의 말을 토대로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본즈라는 이론) 규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본즈와의 관계가 시간 이동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면.... 본즈와 잘 되지 않으면 과거로 돌아가버린다는 건가?

나는 어떤 상황에서 시간이 갑자기 미래로 건너뛰었는지 정리해보았다. 첫 번째는 자고 일어났을 때 이동했고, 요크타운에 들렀다. 두 번째는 함교에서 멀쩡히 의식이 있을 때 이동했고, 우든호 임무에 투입되었다. 첫 번째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라면 확실히 이동하기 전에 본즈와 갈등이 있었다.

요크타운에서 제이미를 만난 후 본즈는 내가 아직도 제이미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오해했다. 다행히 본즈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오해가 풀렸고 그 후 시간 이동이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얼추 들어맞는 것 같았다. 본즈와 갈등을 풀면 미래로 가고, 그러지 않으면 과거로 돌아가고.

그런데 그게 규칙이면 첫 번째 시간 이동을 어떻게 설명하지? 그때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평소와 크게 다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찾자면... 아, 그래.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으며 얌전히 지낸 거?..... 설마 본즈는 그것도 엄청 화가 났었던 건가?

"짐."

본즈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다시 해변가로 돌아왔다.

"무슨 일 있냐니까."
"어.... 있잖아."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스팍에게 내 추측을 들려주고 싶었다. 아니지, 잠깐만. 지금 스팍은 내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잖아. 젠장! 그걸 증명하자고 또 우든호 임무에 뛰어드는 건 사양이다. 호텔로 돌아가면 호텔 컴퓨터를 사용해서 익명으로 신고를 넣을 것이다. 이날 어디로 향하는 화물선 우든호에 위험한 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면 출발 전 라벨 작업을 할 때부터 광물을 빼낼 수 있겠지.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내가 요즘에 읽고있는 소설이 있는데."

나는 고민 끝에 내 상황을 공상과학 소설처럼 꾸며서 본즈에게 설명했다. 물론 이름이나 근무지 같은 자세한 사항은 전부 다르게 바꾸었다. 즉석에서 지어내느라 힘들었지만, 본즈의 생각이 어떤지 듣고 싶었다.

"....흠. 그러니까 주인공이 시간을 이동하는 규칙이 뭔지 궁금하다는 거지?"
"그래."
"소설에....상당히 이입했구나?"

본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어린애 취급 당한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해졌고 괜히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아무튼 너는 어떤 것 같냐고! 말해 봐."

본즈는 잠시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처음에 주인공은 갑자기 이혼을 당했다며 전남편을 원망했잖아? 그런데 과거로 돌아와서 옛날에 겪었던 일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 갑자기 이혼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응.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몰랐고 계속 잘못된 선택만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전남편도 조금 수상해. 무슨 보물을 수집하는지 몰라도 그걸 계속 숨기고..."

나는 '연구'를 '보물 수집'으로 바꾸었다. 연구와 보물 수집이 무슨 상관이냐면, 아무 상관도 없다. 그래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뭐, 본즈가 17세기 해적들이나 노릴법한 보물상자를 들고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꽤 웃기기도 했고...)

"내가 볼 때는 주인공이 갈등을 해결해서 미래로 가는 게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미래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갈등의 원인을 깨달아야 한다고?"
"응. 그리고 주인공과 전남편 사이의 가장 큰 갈등은 이혼이야. 주인공은 처음에 5년 전으로 돌아갔지? 두 사람이 이혼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시작이 5년 전인게 아닐까?"

본즈는 소설에 상당한 이입을 했다며 웃은 조금 전의 태도와 다르게 내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첫번째 이동이 일어나기 전에 주인공은 전남편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 시기에 특정 보물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도 깨달았고. 두번째 이동이 있기 전에는 주인공과 전남편 사이에 낀 서브 남자 주인공이...."

문득 제이미를 '서브 남자주인공'이라고 말하게 해서 미안했다. 그가 제이미라는 걸 알면 '너와 나 사이에 낀 개놈'이라고 했을 텐데.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 눈치챘잖아. 주인공은 마구잡이로 시간을 이동하는 게 아니라 이혼의 원인이 숨겨진 시간대를 지나가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거지. 그런데 나는 서브남자주인공 보다는..."

본즈의 추측은 상당히 그럴 듯 했다. 아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 본즈가 하는 연구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

지금까지 나온 단서를 조합해보면 본즈는 신약을 만드는 중인데 그건 유전병 아니면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이혼하기 1년 전,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한 그 시기에는 확실하게 말해주었었다. '박테리아와 결합해서 활성화를 늦추는 약'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박테리아는 '원시적인 형태의 폐'를 가진 생명체가 들이마시면 한 달안에 죽을거라고도 말했지. 그러니까 그건 본즈가 현재 진행하는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얻으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옛날에 케빈과 함께 굳은 폐세포를 되살리는 실험을 했던 것처럼.)

본즈는 줄곧 호흡기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건가? 본즈가 만드려는 약은 병에 걸린 폐를 치료하는 약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바이러스가 아니라 유전병일 것이다. 그가 몇 년에 걸쳐서 연구하는 병이 가벼운 병은 아닐 것 같은데,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이러스가 필요했다. 인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바이러스를 엔터프라이즈호 안에서 배양하며 연구했을 리가 없었다.

종합해보면 본즈는 아직 치료제가 없는 유전병을 연구하고 있다. 그 병은 진행되면 호흡이 멎는다(아마도?). 본즈는 나에게 연구에 대해 숨긴다. 갑자기 생각이 안 좋은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본즈가 아팠던 게 아닐까?'

아니야. 나는 새로운 가설을 빠르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면 왜 숨기는 건데? 사실 숨길 이유가 없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그럴리가 없어. 본즈가 병에 걸렸을리가 없어. 그것 때문에 나를 떠났을리가 없어. 본즈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지겨워져서 떠난 거야.

'그러면 갈등의 시작이 5년 전인 이유가 뭘까? 그때는 제이미도 없었는데.'

"짐?"

그때 본즈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나는 본즈의 눈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가설을 지워내려 했다. 케빈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메일이 떠올랐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는 것은 없어. 아무것도.'

웃기지마, 케빈. 본즈는 아프지 않아.

"....나는 괜찮아. 더워서 그래."
"더워? 바람이 안 불어서 그렇지 지구로 따지면 가을정도의 기온인데. 햇빛 때문에 그런가..."

본즈는 갑자기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그의 손은 딱 기분좋을 정도로 차가웠다.

"좀 낫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즈가 아픈 게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본즈는 아픈 게 아니니까.

"계속 말해줘. 서브 남자주인공 보다는 뭐?"
"그녀석 보다는 주인공 앞에 나타나는 P가 마음에 걸려."

P는 물론 케빈을 말하는 거였다.

"왠지 P도 시간을 거슬러 온 인물 같지 않아?"
"그럴 것 같기는 하지."
"P와 주인공이 어떻게 얽혔는지 몰라도 가는 곳마다 따라가는 걸 보면, 주인공이 이동할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게 아닐까?"

케빈이 나와 같이 움직인다고?

"P는 분명 규칙이 뭔지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목적은 미래로 돌아가는 거겠지."
"그러면 우든...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주어진 위험한 임무에 전남편을 끼워놓는 이유는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면 미래로 갈지도 몰라서?"

다음에 케빈과 만나면 모가지를 부러트려야겠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니면 한 때는 같이 찾던 보물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에 커다란 반전이 있을 것 같아."
"....반전?"
"응. 대충 이야기의 흐름을 보니까 작가는 독자가 '전남편이 수집하려는 보물에 뭔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혼한 게 아닐까' 의심하도록 유도한 것 같거든."

의심하도록 유도한 것뿐이라고? 그러면 그 보물은, 아니, 무슨 연구를 하는지 숨기는 이유가 뭔데?

"나는 전남편이 보물을 찾는 이유가 주인공한테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뭐?"
"처음에는 아니었겠지. 그런데 주인공과 서브 남자주인공의 관계 때문에 결혼 생활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라졌고, 나중에는 이것만 찾으면 주인공이랑 이혼하고 만다는 생각으로 버틴 게 아닐까? 소설에서 그 보물은 지금까지 누구도 찾지 못했던 거라고 묘사된다며. 보물의 가치를 주인공과 공유하기 싫었겠지. 결혼하면 재산이 묶이잖아. 내내 숨기다가 마침내 그걸 찾았을 때 이혼한 거야."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본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솔직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 우주를 싫어하던 그가 엔터프라이즈호에 탄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떨어져있을 바에는 우주에 있겠다고 했지만, 실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따라 지상직에 머물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러웠다던가. 자존심 때문에 차마 묻지 못했을뿐 나와 제이미의 관계를 의심했었듯이....속으로는 나를 수없이 증오했던 게 아닐까?

이혼하기 1년 전에 본즈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 건 그 시기에 연구가 어느 정도 성공 단계에 들어섰고, 갈라서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했는지도 몰랐다. 더는 나에게 잘해줄 필요가 없던 거다. 바로 이혼하지 않은 이유? 뻔한 이유지. 그의 직책이 CMO인 이유는 함장인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지상직으로 바꾸면 신분도 달라지고 지원받을 수 있는 범위가 확 줄어들 것이었다. 어느 정도 결과를 끌어낼때까지는 엔터프라이즈호에 남아있는 게 현명했다.

본즈가 아프다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그럴듯 했다. 애초에 그렇게 큰 병을 가진 사람이 함선에 어떻게 타겠는가? 승선하기 전에 건강검진에서 광속으로 탈락할 걸? 그리고 또, 결혼하기 전에 병을 가진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리가 없다.

"짐? 많이 더운 거야?"

본즈는 걱정된다는 듯, 내 얼굴을 눈으로 세심하게 훑었다.

"아니.... 덥지 않아."

열은 좀 받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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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핫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