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틱, 틱, 틱, 틱, 틱......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회색 벽과 아닐로그 시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은 나의, 아니, 우리의 집이었다.

장소는 거실. 빈티지한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벽을 회색으로 칠했다. 아날로그 시계는 골동품 상점을 돌아다니며 직접 구매했다. 소파는 본즈의 안목으로 골맀고, 탁상은 내가.... 그리고 모퉁이에 놓인 화분은 본즈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아니다. 화분은 내가 사다 놓았다. 거실의 모퉁이를 돌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데, 신혼부부였던 시절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실수로 화분을 쓰러트렸다. 본즈는 그 화분을 각별히 아꼈다. 그런데 산산조각 났지, 흙은 바닥에 뿌려져 그 자리에 새로운 식물을 심어도 될 것 같지, 기존에 자리를 차지하던 난초는 망가졌지..... 젠장.

'무슨 일이야?'

화분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본즈가 달려왔다. 나는 그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내가 새로 구해다줄게. 똑같은 것으로....'

그렇게 웅얼거리고 있는데 본즈는 화분보다 내 몸을 먼저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나는 이런 게 낯설었다. 연애할 때도, 결혼한 뒤에도 본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않았다. 남들은 이런 면을 상냥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럴 때마다 오히려 먼 타인처럼 느껴졌다. 본즈는 어째서 나한테 화내지 않는 걸까? 어떻게 하면 소중한 물건이 훼손되었는데 내 걱정부터 할 수 있는 걸까.

'다친 곳 없어.'
'앞은 보고 내려왔어야지. 화분이 깨지면 얼마나 날카로운데-'
'저기... 미..'
'됐어. 다치지 않았잖아.'

우리는 함께 어질러진 바닥을 정리했다. 며칠 후, 나는 최대한 비슷한 화분과 난초를 찾아서 가져다 놓았다. 본즈는 나에게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기쁘게 받았다.

"....잘 알잖아. 짐? 듣고 있어?"

나는 본즈의 목소리에 이끌려 신혼 시절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뭐라고?"
"내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네가 더 잘 알거라고. 나는 그저....남은 인생을 지구에서 혼자 보내고 싶어졌을 뿐이야."

오, 맙소사. 본즈가 이혼하자고 말했던 때로 이동했다. 시간을 어느 정도 뛰어버릴지 예상할 수 없다지만 이건 너무.... 너무 최근으로 와버렸잖아.

"본즈, 안 돼."
"그냥 좋게 끝내자.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던가, 아니면 싫어진 게 아니라.....그냥 좀 지친거야. 이제는 혼자 지내고 싶어."

본즈는 피곤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으로 그를 훑으며 예전과 달라진 점을 찾았다. 전보다 몸무게가 준 것 같았고, 눈가는 생기 없이 건조하기만 해서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싫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본즈의 손을 잡았다.

"이혼이라고? 절대 못 해줘. 적어도 나랑 40년은 붙어있겠다고 했잖아!"

본즈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잘못 먹었냐는 표정이었다.

"아, 본즈!! 난 너랑 이혼 못 해."

본즈는 슬슬 화가 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돌아서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

나는 허겁지겁 본즈를 쫓아가다가 실수로 모퉁이에 놓은 화분을 발끝으로 치고 말았다. 발가락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은 와장창 깨진 화분을 내려다본 순간 사그라들었다. 본즈는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나와 화분을 번갈아 힐끔 바라보다가 그냥 다시 발걸음을 옮겨버렸다.

모른척했다. 어쩌면 다쳤을지도 모르는 나를, 그는 눈길만 잠깐 주고 돌아서버렸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단숨에 그를 앞질러 문 앞을 가로 막았다.

"가지 마."
"....유치하게 뭐하는 거야. 내 말이 진지하게 들리지 않나본데..."
"진지해. 그러니까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본즈가 나를 밀어내며 밖으로 나가려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사나운 눈초리에 여기까지 뛰쳐나온 기세는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숨이 막혔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본즈의 인내심은 한계에 가까워졌다.

"비켜."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본즈, 우리 관계... 분명 다시 돌려놓을 수 있어. 아직은 희망이 있잖아. 나는 정말로 변했어. 믿어줘, 제발.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보고 너를 보낼 수는 없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줘. 내가 정말 잘할게. 네가 지구에 있으라면, 나도 지구에 있을게. 부탁이야. 이렇게 애원할게. 지난 시간을 너에게 보상할 수 있게 해줘."

나는 거의 울다시피하며 본즈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본즈는 여전히 차가우면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비켜."

이제 더는 그를 붙잡을 힘이 남아있지않았다. '아니야, 이 사람은 본즈가 아니야. 그는 내가 다치면 항상 돌봐주었어.' 나는 문을 나서는 본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네가 물었잖아."

본즈는 문가에서 잠시 멈추었다.

"'네가 정말로 몰랐을까?'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언제적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에게는 옛날옛적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10초 전 일이나 다름없거든."
"이상한 소리하지말고 이혼서류에 사인이나 해."
"본즈,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 혹시 너도 시간.....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게 아니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에 호흡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 그건 아니라는 거. 그러면 역시 그거네. 네가 연구하는 거....유전병 치료약. 개발에 성공했는데 그 가치를 나랑 공유하기 싫은 거지?"

본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를 쫓아 밖으로 나가며 소리쳤다.

"다 알아! 네가 나랑 이혼하려는 이유가 그거잖아!"
"마음대로 생각해! 질린다, 제임스 커크."

본즈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무슨 걸음이 저렇게 빠른 거야?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정원을 가로 질렀다. 허나 본즈는 어느새 길목까지 나갔고, 나는 멈춰서 숨을 고른 뒤에 다시 소리쳤다.

"확실하게 말해주기 전까지는 너랑 이혼 못 해!!"

이웃집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건축된 주택들이 왜인지 창문은 똑같이 블라인드로 가려져있었다. 아무리 가려놓아도 창가에서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체면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본즈를 잡고 싶을뿐이었다.

"말 해! 네가 괜찮다고 말하라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말 해...... 말해줘. 그냥 내가 지겨워서 떠났다고. 너무 밉고 다시는 보고싶지 않아서라고...."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내 몸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이웃집 앞 정원에 세워놓은 표지판이(이 앞을 지날 때나다 빈티지는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감동하고는 했지) 바람에 흔들렸다.

삐걱, 삐걱, 삐거걱..... 고개를 돌리자 표지판에 쓰여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진실?"

나는 허탈하게 웃다가 표지판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양손으로 표지판을 잡은 다음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대로 뽑아버릴 작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꼴사납게 낑낑거린지 1분쯤 지났을 때 집주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봐, 뭐 하는 짓이야!"

나는 냉큼 표지판을 놓고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뒤를 잠시 돌아보니 표지판에 쓰인 문구가 변해있었다. '홉스 부부의 행복한 집'으로. 아아, 맞아. 변한게 아니라 원래 저런 문구였었지.

텅 빈 거리를 달리든 동안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주가 나를 함정에 빠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본즈와 나를 갈라놓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아예 주택가를 벗어나자 공원으로 이어지는 진입로가 나왔다. 나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 사이로 터벅터벅 걸아가 그 벤치로 갔다.

나와 본즈의 벤치. 우리가 늘 쉬던 그 자리.....떡갈나무로 만든 벤치가 어서 오라고 따뜻하게 손짓하는 듯했다. 이윽고 벤치에 앉은 그때, 동시에 누군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본즈와 잘 얘기했봤어?"

그는 케빈이었다.

"으악!!!"

나는 비명을 지르다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너 뭐야!"

케빈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발 케빈의 쌍둥이라고 해줄래....? 유령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이제 기억이 난 거야? 내가 죽었다는 거."
"그만.... 내가 엑소시즘 영화를 봐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알거든?"
"제임스."

케빈은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괴었다.

"내가 유령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그렇지만 너는 오래 전에 죽었잖아."
"그렇지. 그건 기억 나. 그리고..... 네가 내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는 것도."
"....뭐?"
"나는 레너드에게 소중한 친구였어. 그런데 너는 함께 장례식에 가지 않았지. 고작 파티에 참여하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야."

나는 손을 허벅지 위에 내린 다음 주먹을 꽉 쥐었다.

"본즈가 가라고 했어."
"너는 눈치도 없어? 당연히 네가 함께 가주기를 원했지만 곁에 있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거잖아. 네가 기대하던 파티였으니까."
"....몰랐어."

케빈은 큰 소리로 푸하하 웃었다.

"네가 정말로 몰랐을까?"

왜 자꾸 그걸 묻는 거야.

그의 물음이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고치지 않은 과거.

진짜 과거.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야, 제임스 커크."

케빈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나는 내 기억들에 집어삼켜졌다.








29.



5년 전.


메디베이 안은 썰렁했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채플만이 눈에 띄었다.

"술루는 어딨어?"

그녀는 고갯짓으로 왼편에 있는 침대를 기리켰다. 나는 술루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른손이 크게 부어있었다.

"어...심하네."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술루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분명 독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술루. 들어봐. 그거 사실 체이슨 중령이 나한테 선물해준 거야."
"체이슨 중령? 그 분은 함장님을 무지 싫어하지않습니까?!"
"그래, 너를 보니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흉터가 남으면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에이 무섭게 왜 그래?"

나는 채플을 불렀다. 어서 그를 돌보지 않고 뭐하냐고 말하며, 은근슬쩍 본즈가 있을 연구실로 향했다. 대체 저기 틀어박혀서 무슨 연구를 하는 거람?

연구실 문은 열려 있었다. 본즈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화면에 대고 무언가 말하는 중이었다.

"케빈, 나 금방 나가봐야 돼."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에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케빈이라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더라?

"내 DNA를 분석한 결과 아직까지 문제의 유전 인자는 발견되지 않았어."
"나도 그랬어. 그래서 쭉 안심하고 살다가 이꼴이 난 거야. 나는 호흡기 없이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해. 폐를 인공으로 교체했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아이리스가 옆에 있어서 정말 고맙지만....너는 네 배우자를 고생시키지 마."
"당연히 그럴 거야. 발병하면 그때는 그와 갈라서겠어."

대체 저게 무슨 소리지? 걸음을 멈춘 순간 본즈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황급히 화면을 껐다.

"짐? 무슨 일이야?"
"점심 같이 먹기로 했잖아."
"그랬지.... 그럼 가자!"

본즈는 머쓱하게 웃으며 앞장 서서 걸었다. 나는 방금 엿들은 통화 내용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려 애썼다. 뭐.... 별일 없겠지. 무슨 일이 있었다면 말해줬을테니까.

*****

근무를 마치고 본즈의 쿼터로 갔다. 본즈는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누웠다. 등에 뭔가 걸렸다.

"짐, 왔어?"

본즈는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을 보더니 표정을 구겼다.

"거기 그냥 누우면 어떡해?"

나는 일어나서 내 몸에 짓눌린 본즈의 옷을 집어들었다.

"왜 옷을 여기에 두고그래?"
"너 주려고 그랬지. 네가 방에 쳐박아둔 옷은 전부 처분했거든."
"뭐? 아 진짜..."

나는 짜증을 내며 본즈의 옷을 바닥에 던졌다.

"네 옷이 너무 낡아서 그랬어."
"내가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그럼 세탁이나 제대로 하든가. 내 방에 버려두고 가면 어떡해?"
"치우려고 했어."
"언제?"
"나중에."
"그러면서 맨날 치우지 않잖아."

피곤했다. 일하고 와서 왜 이런 말을 들어야하는 건지. 나도 내가 잘못한 건 알지만 피곤해서 그에게 대꾸하기 싫었다. 어차피 말싸움 해봐야 지는 건 항상 나니까. 나는 유니폼을 벗고 본즈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갈아입었으면 얼른 와."

본즈가 식탁에 서서 나를 불렀다.

"금방 가."

식탁까지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갔다. 식사하는 내내 본즈가 나를 몰래 힐끔 쳐다보았다. 내 눈치 볼거면서 왜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거람......젠장. 사실 본즈 잘못도 아닌데.

"미트볼 맛있다."

나는 미트볼을 삼킨 다음에 말했다.

"소스가 특별하거든."

네네, 그러시겠죠. 본즈는 웃으며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한테 짜증나지도 않나... 왜 저렇게 다정한 거야?....

'미안해. 아까 까칠하게 굴어서... 오늘 일이 좀 힘들었는데, 그래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나봐. 그래도 너한테 짜증을 내서는 안 됐지. 정말 미안. 그리고 소스 정말 맛있다. 네가 만들어서 그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 대신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뭘 봐."
"뭘 보냐니. 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본즈는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짐."
"왜?"
"나를 사랑해?"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어. 그러니까 여기 앉아있지."

불안하게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화났나? 그렇게 빡친 거야? 이제 어쩌지? 지금이라도 빨리 사과해야 하는데...

"있잖아...언제 나를 사랑하게 된 거야? 분명 처음에는 아니었잖아."

본즈가 물었다. 그 순간은 정확하게 언제라고 콕 찝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본즈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나 역시 그를 닮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서, 너에게 잘 보이고 싶어. 네 옆자리가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겠어?'

하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 낯뜨거운 말이었다.

"몰라..... 그냥 사랑하니까 사랑하지 뭐. 또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본즈는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실은 생도 때 보여준 모습 전부 연기였어.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냥 네게 잘보이려고 했던 것뿐이지."

나는 짧게 하하 웃었다.

"알아."
"뭐?"
"다 안다고, 본즈. 네가 제이미랑 나를 갈라놓으려고 노력했잖아. 결국 트로피는 네가 차지했네?"

본즈는 나를 따라 웃었지만 진심으로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농담이었는데 안 웃겼나. 하여간 본즈는 내가 제이미 얘기만 꺼내면 저런다니까.

음, 제이미 얘기를 꺼내서가 아닌가? 오늘따라 좀 저기압인 것 같기도 하고...

"본즈."
"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럴리가 없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다음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그날 밤, 거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때문에 잠에서 깼다. 거실로 나가보니 본즈가 테이블 위에 홀로그램을 띄워놓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합성까지 앞으로 1시간' 나는 실눈을 뜨고 화면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합성?.....약물인가?

"뭐야, 본즈. 이 시간까지 연구하는 거야?"

본즈는 화들짝 놀라더니 바로 화면을 껐다.

"내가 깨운 거야?"
"그래."

본즈는 나에게 다가와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미안해."
"연구하는 거지? 그런데 왜 지금하는 거야?"
"보고서가 좀 밀려서...사실 오늘 보고서를 전부 작성한 다음에 퇴근했어야 했는데, 너랑 같이 저녁을 먹고 싶었어.."

본즈는 나를 감싼 팔을 천천히 풀고 내 뺨을 어루만졌다.

"괜히 신경 쓸까봐 이 시간에 한 건데 나 때문에 깼구나."
"......얼른 자. 몸 상해."
"걱정 마."
"누가 네 걱정한대? 내 몸 상한다고!"
"하하."

본즈가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나는 본즈의 뺨과 입술 위로 키스했다.

"얼른 침대로 와. 이 시간에 나를 깨웠으면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네 허리 부러지기 전에 얌전히 자는 게 좋을걸."
"하이고, 거기 잘생긴 아저씨. 내가 그쪽 얼굴만 사랑하는 거 몰랐어요? 밤 실력은 영..."

본즈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기고, 나를 발가벗겨 침대로 데려갔다. 나는 투닥거린 후에 즐기는 섹스를 좋아했다. 이게 내 방식대로의 사과였다.

그래-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완벽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에게 숨기는 게 없는 완벽한 부부였다.


*****


"요크타운은 오랜만이네. 어디부터 가지?"

본즈는 질문하는 것처럼 말했다. 가고 싶어하는 곳이 따로 있으면서 왜 저러는 건지, 원. 무슨 가게였더라... 부이...아니, 부아였나? 모르겠다. 아무튼 내 취향인 가게는 아니니 무조건 호텔로 가야지. 좀 쉬다가 컨디션이 괜찮으면 근처 펍에 가야겠다. 본즈도 참,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데 또 놀러다닐 생각을 하는 거야?

"호텔로 가자."
"...그러지 말고 좀 돌아다니자. 오랜만에 둘이서 오븟하게. 어때?"

뭐 오랜만? 매일이 아니고? 엔터프라이즈호에서 그렇게 붙어 있는데 말이지!

"그건 다음에하자."

그때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이내 가까이 다가왔다.

"짐!"

그 사람은 제이미였다. 머리를 짧게 잘라서 알아보는 게 늦었다. 나는 그와 가볍게 포옹한 다음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엔터프라이즈호에 탄다고 너무 힘 준거 아냐?"
"이 정도는 해야지."

제이미는 예의를 갖추려는 것처럼 자세를 고친 뒤 장난기가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엔터프라이즈호에 승선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함장님."

제이미는 몸을 돌리더니 본즈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맥코이 소령님?"
"....그래."

제이미는 '그래'라는 짧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본즈의 손을 놓았고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나저나 제임스, 오늘 일정 있어? 레스토랑을 예약했는데."

대답하려는 그때 본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일정이 있어."
"하하, 저는 제임스에게 물어봤는데."

제이미는 친밀한 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이 둘은 앙숙이라니까. 본즈가 제이미를 조금만 더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냥 노는 코드가 잘맞는 친구라고.

(제이미는 정말 나를 친구로만 생각할까 가끔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선 넘은 적은 없어.)

"지미."

본즈는 내 손을 잡으며 나를 평소보다 친근하게 불렀다. 속보여, 본즈. 제이미를 의식하는 게 뻔히 보인다고.

"어떻게 하고 싶어?"
"음....제이미랑 놀다가 갈게!"
".....그래."
"왜 그래, 본즈. 오랜만에 친구랑 노는 거잖아."

평소에는 너랑 붙어있잖아. 거의 24시간을. 좀 봐 줘라, 응?

"호텔에 먼저 가 있어. 나중에 그... 네가 좋아하는 가게 가자. 부이크!"
"부아크야."
"그거나 그거나."

나는 본즈의 손을 놓고 제이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날 잔뜩 취한 채로 호텔에 돌아갔고, 바로 잠들어버렸다. 물론 본즈와의 약속은 지킬 것이다. 다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30.



"그만."

나는 양손을 머리에 대고 소리쳤다.

"그만 해....."

그러자 케빈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진실이야. 있는 그대로의 진실."
"그렇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케빈을 밀어냈다.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으면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또 시간이 바뀌고 있었다.

"제발 그만......"

나의 기도는 먹히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 신전과 비슷한 웅장하고 커다란 건물 앞에서 정신을 차렸다. 발치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조금 멍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갔다. 길거리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곳은.... 허물었는데.

별안간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났다. 이곳은 법정 앞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본즈와 이혼을 마치고 막 나온 상태일 것이다. 분명 가까이에 본즈가 있을 터. 방향은 아마도....이쪽. 나는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로를 따라 달렸다. 잠시 후 본즈의 뒷모습이 보였다.

"본즈!!"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본즈는 바로 멈추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또 뭐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즈, 가지 마."
"이제 우리는 남남이야. 부탁이니까 이러지 마."
"나는... 제이미와 선 넘은 적 없어."

본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고?"
"사실이야."
"....어쩌라고. 나는 아직도 너희 두 사람이 히히덕거리면서 늦게까지 붙어있던 모습을 기억해. 우든호 임무를 준비할 때 특히 심했지. 너는 어차피 기억 안 나겠지만."
"믿지 않아도 되는데, 너보다는 내 기억이 더 선명해. 그리고... 알고 있어. 내가 종일 제이미와 함께 있었고, 결혼 기념일도 잊어버린 거. 그런데 그때 제이미가 나한테 이상한 음료를..."

본즈는 내 말을 듣기싫다는 것처럼 끊었다.

"빌어먹을, 짐! 그래서? 너는 네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내가 여지를 준 건 알아. 하지만... 그건...."
"너는 항상 핑계가 있더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는 너는!! 너도 숨기는 거 있잖아. 말하지 않았던 거 있잖아."
"아, 내 연구?"
"그래."
".....이제 이혼했으니까 당당히 말해줄게. 그 연구는 내 인생의 역작이야. 그걸로 몇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지 네가 알면 깜짝 놀랄 걸?"
"그걸 나한테 숨겨야 했던 이유가 뭔데?"
"그건 온전히 내 것이니까. 좋든 싫든 너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야, 짐. 내가 만들어낸 신약은 네 이름을 통해 더 멀리 알려지겠지. 그건 싫어. 이 사실을 알았다가 네가 이걸 빌미로 이혼하지 않을 까봐 두려웠고."
"뭐? 내가 왜? 나는 네 성공을 축하했을 거야."
"너는 유명세 광이잖아. 네 이름이 거론될 수 있다면 어떤 위험한 임무에도 뛰어들어 아드레날린을 불태우지."

본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유명세 광' 그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내 험담을 할 때마다 늘 비아냥거리면서 했던 말이었다. 나는 벙찐 표정으로 본즈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말이 틀려? 그랬다면 한 번은 내 부탁을 들어줬을 거야. 지상직을 신청했을 거라고."

본즈는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자 또 케빈이 내 옆에 나타났다. 그는 위로를 건네려는 것처럼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전남편 만큼 무서운 건 없지."
"이건... 진짜가 아니야. 본즈가 나한테 이럴리가 없어."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글쎄."

케빈은 고개를 숙여 억지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야, 제임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가 말한 순간 어이없는 생각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고,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또 내가 어떻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지도... 이제는 알겠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구나."

나는 케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

말도 안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말이 되지 않아서 이제 앞뒤가 맞았다. 과거로 돌아온 원리, 시간을 넘나드는 이유, 나만 볼 수 있었던 케빈의 편지...... 전부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임스, 너는 지진 속에서 죽지 않았어."

케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기적처럼 목숨을 부지했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네 신체는 벌써 절반이 인공부품으로 교체되었는데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고 뇌는 죽어가고 있지. 지금은 가까운 연방 행성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이어가는 중이야."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다행히 네가 청각까지 손상된 건 아니거든. 너를 옮기는 소리, 수술하는 소리, 병문안 온 사람들이 내는 우는 소리까지 전부 들었어. 나는 너야, 제임스 커크. 네가 만들어낸 팽이."
"팽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명확하게 해주는 도구 같은 거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도 진짜 같은 거리였다. 비록 과거에서 멈춰져있지만, 저 아래에 있는 카페는 한 달 후 고전 아일랜드 펍으로 변할 예정이었고 우측의 마사지샵은 언젠가 이름모를 사무실로 바뀔 예정이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우든호에서 보았던 컴퓨터 화면 메세지. 그 마지막 문장은 이걸 의미했던 건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내가 결혼 생활 내내 본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본즈는 늘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그걸 알면서 제멋대로 행동했고, 가끔은 내 위치를 이용해서 함부로 대하고도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제이미를 신경 쓰는 걸 알았지만 같이 있으면 재밌다는 이유로 계속 친하게 지냈다. 나는 본즈를 단 한 순간도 존중하지 않았던 거다.

지금까지 이동했던 시간들을 돌아보니 모두 특히 후회스러웠던 날이었다.

'그날, 그 순간에 내가 다르게 말했다면?'

'그리고 그곳에 지금의 내가 있다면?'

'만약 내가 아무 것도 몰랐고, 우리가 서로 오해한 것뿐이라면?'

음.....몇 가지 소망도 섞여 있군. 케빈이 옆에 있기 때문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어째서 내가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위험한 상태라면 왜 깨어나지 않고 이 환상 속에 갇혀 지내는 거냐고."

내 물음에 케빈이 차분히 대답했다.

"알아버렸으니까."
"뭘?"

나는 지난 날 본즈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억은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구성되어있으니까.'

"....이건 내 기억의 궁전이야. 그것도 내 입맛대로, 내 생각대로 고치고 꾸며낸.... 이런 곳에서 뭘 알아낼 수 있다는 건데?"
"네가 과거로 돌아가 고쳐놓은 기억은 비록 상상의 산물일지라도, 실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야.

케빈은 내 옆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일어난 사건도 그대로고 등장 인물의 성격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는 너무 자세하게 떠올려버린 거야. 전에는 지나쳤던 사소했던 몇몇 단서와 징조를..... 그 결과 너는 제이미가 일부러 음료를 먹였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 그리고....."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말으 들으니 더욱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답 또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무서웠지만, 알아야 했다. 나는 이걸 알아내기 위해 계속 기억에 매달려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갔고 미래로 나아갔으니까.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케빈은 사라져있었다. 대신 본즈가 옆에 앉아 있었다.

나의 본즈. 내가 사랑하는, 내가 유일하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본즈..... 나는 몸을 살짝 기울여 그에게 기댔다.

"본즈..."
"응?"
"너 아픈 거야?"
".....응."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직도 지진 속에 있는 듯한 절망이 나를 짓눌렀다.

"약은? 만들어낸 거야?"
"글쎄.... 나는 실제가 아니라 네 상상인걸. 나도 모르지."

나는 본즈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그에게서 소독약 냄새와 솔잎 냄새가 났다. 영원히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

본즈가 말했다. 나는 살포시 고개를 들었다. 본즈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더 오래 있으면 영원히 이곳을 나가지 못하게 될 거야."
"....죽을 테니까?"
"그래."
"본즈...."
"응."
"돌아가면 네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아.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못된 말."

본즈는 손을 뻗어 검지와 중지를 구부리더니 그 사이에 내 코끝을 끼우고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
"엄살은. 너는 항상 엄살이 심하다니까. 죽을 용기가 있으면 하이포나 좀 얌전히 맞지."
"....본즈. 진심이야. 나 이곳에 남고 싶어."

본즈는 나를 꽉 끌어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안 돼. 내가 어떤 걸 바라는지 알잖아."
"....너는 진짜가 아니라며."
"그래도 알잖아."
"그럼 대답해. 왜 아프다는 사실을 숨겼어?"
"그건....음. 처음에는 당연히 병이 세대를 건너 뛰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걸리지도 않을 병인데 괜히 걱정하게 할 필요가 없잖아. 그 다음에는 뭐... 네가 제이미를 사랑하는 건지 나를 사랑하는 건지 확신이 들어야지. 잘 생각해봐. 나는 남편을 옛날 애인에게 빼앗기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하잖아. 내가 너한테 말할 수 있겠어?"
".....너는 자존심이 너무 세."
"그걸 알고 결혼했으면서. 내 성격 알잖아? 이혼하자고 하던 순간에도 제이미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던 거."
"......나는 당연히 네 옆에 남았을 거야. 그게 지구든, 우주든...."
"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네가 그럴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그럴거라고 해서 기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그가 계속 놓지 않고 안아주었으면 좋겠지만, 이내 나를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
"본즈."
"돌아가서 말해줘."

무엇을? 그리고 누구에게?

"네 진심을. 진짜 나에게. 네가 줄곧 하고 싶었던 말 있잖아."

나는 바지를 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진심도 목숨이 붙어있어야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본즈가 나를 만나줄지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부딪쳐봐야겠지.

"돌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돼?"

물어본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두통이 찾아왔다.

"본즈?"

—삑.

—삑 —삑.

커뮤니케이터 소리?.... 아니야. 저건 커뮤니케이터가 아니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가 약간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나는 전부터 새하얗게 빛나던 것이 전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동자를 왼편으로 굴리자 내 몸 상태를 나타내는 의료 기기들이 보였다.

—삑 —삑.

심장 박동, 혈압 모두 안정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구나. 실감한 순간 엄청나게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클링온에서 보낸 고문도구로 온몸을 난도질 당한 것 같았다.

"으....."

앓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때 옆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나는 이번에는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렸다. 누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

의사인가? 나는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다가 통증 때문에 약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으..."

옆에서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드려왔다. 옆에 있는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 정신이 들어?"
".....본즈?"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야?

"이래서 내가 지켜봐야 한다고 했는데! 빌어먹을 연방 의사 같으니라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저 말투는 분명 본즈가 맞네..

"짐, 조금만 참아. 지금 진통제를 놓았어."

그의 말대로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본즈의 얼굴을 보았다. 전보다 약간 더 말랐네. 목에는 처음 보는 기계를 달고 있고.

"본...즈."
"무리해서 말하려고 하지마. 그리고 오해는 마. 네가 사고를 당하자마자 스타플릿에서 부르는 바람에 온 거니까. 네 폐가 좀 심하게 망가졌는데, 내가 어쩌다보니 그 분야에 전문적이게 되어서.... 아무튼 지금은 다 괜찮아."
"내..가....."
"말하지 말라니까?!"
"....잘못했...어."

본즈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번에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까워서 조금만 뻗어도 그의 목까지 손이 닿았다.

"미안...해. 네 몸....너무..늦..게...알았..어."

본즈는 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손이 닿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정말...."

나는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게 내 진심이었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전부 내 잘못이었어.

본즈는 천천히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본즈는 쉬고 갈라진데다 발음까지 부정확한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늦은 사과는 본즈의 지난 시간을 조금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받은 상처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고, 현실의 나는 과거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고쳐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게 새로운 시작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번 시간은 정확히 한 방향으로 흘러가겠지.

그거면 충분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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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핫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