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본즈가 아픈 게 아니라면, 우리의 끝이 어떤 결말을 맞더라도 다 괜찮아.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설사 본즈가 나에게서 도망치더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한 결정이라면 이제는 놓아줄 수 있었다.

나는 본즈와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본즈에게 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어쩌다 스타플릿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매해 생일 마다 찾아오는 깊은 공허함까지도 본즈는 전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비밀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배신감을 느낀 동시에 어째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는 마음도 들었다. 왜냐면 내가 우리의 관계를 망친 주범이고, 새로 생긴 비밀을 공유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왔으니까.

유전병 연구라. 무엇을 위해서 하는 일일까? 자기 만족? 아니면.... 케빈? 공원에서 보았던 그는 기계장치를 얼굴과 목 주변에 차고 있었다. 함께 연구한 이유가 사실은 그가 병에 걸렸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왜 지금은 기계를 차고있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확인해야 했다. 본즈의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병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솔직하게 대답해준다는 보장은 없어도, 넉살좋게 웃으며 그런 건 없다는 말을 해준다면 크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본즈가 수영복에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패드로 그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 동생 그 누구도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 건가? 그래도 세 명 전부 통화가 되지 않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고민하다 본즈의 동생에게 메일을 보냈다. 곧 찾아올 결혼 기념일 이벤트를 준비하는 중인데, 본즈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으니 연락해달라고 했다. 그가 무언가 감추려고 한다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물어봐야하므로 어쩔 수 없었다.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약 시간만 허락한다면 정말 기념일을 제대로 보내고 싶으니까.

아닐 거야.

그렇게 확신하면서 왜 불안한 건지. 모순적인 감정을 어떻게하면 누룰 수 있을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잠시 후 본즈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화려한 무늬의 면 티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나는 그를 위아래로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산 거야?"
"저기."

본즈는 해변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기념품 가게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라는 듯이, 자신이 입은 옷보다 더 화려한 색감의 상하의를 건네주며 말했다.

"네 취향인 옷도 샀지."
".....제발 농담이라고 해줘."

본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입을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짐! 여기까지 왔는데 평범하게 입고 돌아다닐 거야?"
"굳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희는 관광객입니다,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주위를 좀 둘러봐봐.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지구인밖에 없어."
"...이거 입으면 이따 밤에 그거 해줄게."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에서 옷을 낚아챘다. '밤에 그거는' 는 우리 사이에서 핸드잡의 은어였다.

(본즈가 가진 손기술은 정말 특별하다니까?)

우리는 해변가에서 나가 셔틀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른 오후 시간답게 어딜가도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했다.

"식사부터 할까?"

본즈가 말했다. 대찬성이었다. 바다에서 수영을 너무 오래했더니 상당히 허기졌고 돌아다닐 힘이 없었다. 우리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유명한 레스토랑 대신 거리의 귀퉁이에 있는 소박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다행히도 관광객들이 거의 없었고 소란스러움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창가쪽 자리로 갔다. 그런데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갑자기 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화살이 내 머리를 꿰뚫은 것만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쓰러질뻔했는데, 본즈가 잽싸게 잡아준 덕분에 무사히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짐? 왜 그래?"

본즈는 정신차리라는 듯이 내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통증이 사라졌고, 나는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방긋 웃었다.

"아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게 뭐야. 정말 괜찮은 거야? 호텔로 돌아갈까?"
"됐어. 배고파서 그런걸 거야."
"의사를 앞에두고 그런 소리를 할 거야?"
"하하."

나는 농담으로 넘기려고 웃었지만 본즈는 진지하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은거지?"
"그럼."
"함선으로 돌아가면 메디베이부터 들려."

그는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늦게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우리가 식당에서 메뉴판을 읽을 때에는 한 가지 규칙이 적용되는데, 바로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 대신 상대방의 메뉴를 골라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규칙은 내가 고른 메뉴의 7할에 알러지 반응을 보인 첫 번째 데이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적용되고 있었다.)

"어떤 음식을 시켜야 잘 시켰다고 소문이 나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본즈가 웃으며 대답했다.

"뭘 시켜도 그런 소문은 안 나."

나는 잠시 뜸 들이다 다시 중얼거렸다.

"어떤 음식을 시켜야 본즈가 좋아할까...."
"그거라면 도와줄 수도 있는데."

나는 메뉴판에서 몇 가지 고른 뒤에 본즈에게 보여주었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어때?"

본즈는 유심히 보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알겠다며 주문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 팔을 잡아서 주문을 막았다.

"잠...깐."
"응? 뭐 잘못된 거 있어?"
"....두 번째로 고른 메뉴는 빼줘."

나는 두 번째로 짚었던 메뉴를 다시 확인했다. 상세하게 표기되어있는 식재료를 보니 그냥 평범한 스튜였다. 다만 이 지역 특산물이 들어가있을뿐이었다. 나는 음식 사진 옆에 쓰인 설명을 읽다가 내가 미처 읽지 않았던 주의사항을 확인하게 되었다.

- 본래 치료를 위한 음식으로, 섭취시 일시적으로 맥박과 호흡이 느려지며 명상에 빠져드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호흡기 질환을 가지신 분은 주문하지 않은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이건 왜?"
"다른 스프가 마시고 싶어서."

정말로 그것뿐인 거지? 나는 물어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산책로가 마련되어있는 숲으로 갔다. 생전 처음보는 나무와 풀을 구경하고 있으니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곳에 오면 한없이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초조하기만 했다. 심지어 두통도 다시 찾아왔다. 지금은 지끈거리는 정도지만 아까처럼 통증의 강도가 심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주위 풍경에 집중했다. 옅은 청록 빛으로 채색된 나무줄기와 오렌지 빛깔의 잎파리들....
바람이 불어오자 잎사귀가 떨어지면서 내 손가락보다 더 작은 들꽃 무리 위로 안착했다. 고작 잎사귀 하나인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은 자신의 손으로 피운 생명이 언젠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하거 있었다.

"무슨 생각해?"

본즈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너무 혼자 우울했나. 나는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본즈의 속도에 맞추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해."
"그런 것치고는...."

본즈는 갑자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떼며 말을 이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는걸."
".....너는 가끔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한다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다니까?"
"아닌데."

유치한 대화를 조금 더 나누다가 별안간 내가 화제를 전환했다.

"이렇게 걸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걸. 전에 이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같이 오자고 했었잖아."

본즈는 앞을 바라본 채 가만히 웃었다.

"그거,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뭐? 아니야. 네가 분명해."
"잘 생각해봐."

나는 어쩌면 내가 떠올린 사람이 제이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와, 미쳤나봐. 나는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도록 입을 꾹 다물고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농담이야."

본즈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는 손을 놓고 그의 어깨와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미안, 미안."

산책로는 금세 끝났다. 우리는 숲을 빠져나가 짧은 건널목을 건넜다. 대로변을 따라 형성된 상점가가 한없이 이어졌다. 곳곳에 세워진 가로등에 서서히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뭘 했다고 벌써 저녁이지? 나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이 거리와 하늘에 뜬 두 개의 달 그리고 본즈의 얼굴을 번갈아 골똘히 바라 보았다.

"본즈."
"응?"
"너는.... 지금 이대로도 행복해?"

가볍게 흘려듣거나 아니면 건성으로 대답할 줄 알았으나 본즈는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행복해. 지난 몇 년간 정말 별에 별 일이 다 있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여전히 함께고.... 또 이곳은 우리가 꿈 꿔왔던 곳이잖아."
"....네가 원하는 장소는 지구잖아. 혹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흠.... 글쎄? 물론 이 지긋지긋한 우주공간에서 벗어나 지구로 가게 된다면 좋긴 좋을 거야. 그런데 나도 결국에는 너랑 비슷한 이유로 엔터프라이즈호를 선택했으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나랑 비슷한 이유라고?"
"네가 그렇듯 나 역시 내 꿈을 쫓아왔을 뿐이야."

본즈는 몸을 돌려 내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 네가 내 꿈이야, 짐 커크."

네 꿈은 이미 변한지 오래잖아. 나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행복해. 네가 있어서."

우리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껴안고 있었다.

"본즈..."
"응?"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대 몰라. 왜냐면 나도 최근까지 알지 못했거든. 분명 우리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고, 평생 살아온 날에 비하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한없이 작아지는데.... 이제는 너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한다니 감동인걸."

본즈는 팔을 풀고 다시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너무 좋았다.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었으나 두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만 호텔로 돌아가자."
"그래."

발걸음을 옮긴 그때 길거리에서 케빈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그 남자가 케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왜 그래?"

본즈가 물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누구?"
"....케빈. 그런데 내 착각인 것 같아."

본즈는 걸음을 멈추더니 놀란 표정으로, 아니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케빈을 봤다고?"
"지금 엔터프라이즈호에 타고 있잖아."
"아, 그 케빈."

본즈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난 또. 그녀석은 워낙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착각이 아닐지도 몰라."
"내가 누굴 말하는 줄 알았길래 그렇게 당황한 거야?"
"옛날에 나랑 같이 연구했던 동료직원. 물론 친구이기도 했고."

나는 그 사람을 말하고 있는 건데? 네가 말하는 건 기술부 케빈 로이먼 같고. 본즈는 내가 끼어들 틈없이 계속해서 얘기했다.

"하긴, 그럴리가 없지. 너랑은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다... 음, 그나저나 그녀석이 떠난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걸."

그 순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 당시 나는 매일매일을 기분 좋게 보내고 있었다. 단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구로 귀환했으니까. 제이미는 축하의 의미로 엔터프라이즈호 크루 전부를 초대할 수 있는 성대한 파티를 열겠다고 제안했다. 얼마나 정신없이 현란하고 즐거울까? 나는 모두가 기뻐할거라는 생각에 당연히 그러라고 말하면서 이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제이미는 한 번 같이 기획해보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그러면 너무 바빠질 걸 알았지만 흔쾌히 수락하기로 했다.

(어쩐지 생도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고.)

마침내 파티 날짜가 다가왔을 때, 한껏 들떠 있던 나와 달리 본즈는 서재에서 나오려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안 나올 거야? 곧 파티가 시작된다고. 내가 제이미랑 어떤 걸 준비했는지 보면 너도 깜짝 놀랄걸."

본즈는 대답이 없었다. 설마 자고 있는 건가? 나는 문에 잠금이 걸려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본즈는 책상 앞에 서서 화면에 띄운 사진을 보고 있었다.

"본즈? 왜 부르는데 대답이 없어?"
".....짐."

그는 화면을 다급하게 끄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에 잘 알고지내던 친구가 오늘 병원에서 죽었어."

나는 본즈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떡해? 괜찮아?"
"...괜찮아. 항상 아팠던 녀석이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거든. 너도 예전에 한 번 본적 있는데. 공원에서...."

나는 케빈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아는 척했다.

"응, 알아. 장례식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그럼 가봐야겠네. 나도 준비할게."

내가 옷을 갈아입으려하니 본즈가 말렸다.

"아니야. 오늘 파티를 네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지 아는데...그리고 나 정말 괜찮거든. 장례식장에 오래 머물 생각도 없고. 들렸다가 바로 파티장으로 갈게. 너는 먼저 가 있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본즈가 서재를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입을 다문 이유는 하나였다. 즐거움을 뒤로하고 그와 함께 장례식장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본즈의 절친이나 우리가 함께 아는 지인이었더라면 무조건 갔겠지만 본즈도 덤덤해보이는데 내가 굳이 가야할 필요가 있을까?






27.




케빈은 한참 전에 죽었다. 그러면 그놈은 대체 어떻게 이 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본즈가 우든호 임무에 참여하도록 부추겼던 사람은 또 누굴까? 케빈이었다면 본즈가 알아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터였다. 케빈이랑 외형적인 특징이 일치하는 다른 크루가 함선 안에 있었던가?....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빌어먹을 하나도 이해가 안 가.

나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에 나가자 도심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화려한 도시의 불빛에 시선을 빼앗긴 뒤로는 기온이 별 신경쓰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 하늘에 둥둥 떠있는 달만큼이나 독특한 색의 가로수가 보였다. 낮에는 어느 길목을 다녀도 보였던 관광객들이 사라지고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만이 길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멍하니 바깥을 보고 있으니, 막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본즈가 내 옆으로 왔다.

"짐, 왜 테라스에 나와있어? 그러다가 감기 걸린다?"

본즈는 뒤에서 살짝 안으면서 자신의 따뜻한 체온으로 반쯤 얼어붙은 나를 감쌌다. 그에게는 상쾌한 민트향이 났다. 나는 여전히 바깥 풍경에 시선을 두며 도로를 쏜살같이 지나가는 셔틀을 내려다보았다.

"짐?"

본즈는 왜 대답이 없느냐는 듯, 손등으로 내 뺨을 문질렀다. 나는 계속해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본즈는 내 어깨 위에 고개를 묻다가 돌연 뺨에 키스하려 했다. 나는 그를 밀어내며 테라스 난간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음..."

본즈는 눈꺼풀을 문지르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무슨 실수했어?"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 연기를 하지는 못했다. 본즈는 나와 시선을 맞추려고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짐."
"응."
"무슨 일인지 말해줘."

(죽은 줄 알았던 네 친구가 다시 살아돌아왔더라. 어, 그런데, 나도 그래! 나도 몇 번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미치겠군. 고민 끝에 나는 당장 케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계속 생각하며 끙끙거려봐야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는데다, 그보다는 본즈와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본즈."
"응?"
"나는.... 너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술 마셨어?"
"아니야. 그냥, 들어봐."

본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매사에 너무 이기적이었고, 내 생각밖에 못 했어."
".....갑자기 웬 고백이야? 아니, 고해인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좀 진지하게 들어줄래?"
"알겠어. 그런데 꼭 이렇게 추운 곳에서 청승 떨면서 말해야겠어?"
"....본즈. 나한테 서운한 거 없어? 있으면 지금 다 말해줘."

내 물음에 본즈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 건 꼭 서운한 게 있는 사람이 묻던데."
"나는 그런 거 없어."

나는 본즈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도 없어."

거짓말.

그렇게 앞으로 몇년 도 침묵하다가 갑자기 이혼하자고 할 거면서. 본즈, 그냥 나에게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더 주지 그랬어. 1년 정도 냉정한 걸로는 부족하잖아. 사실 그게 2년이었어도, 아니 5년이 더 걸렸다고 하더라도 부족했을 거라는 건 알아.

그러니까 말해주지 그랬어.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었잖아. 계속 그런식으로 행동하면 언젠가 너를 떠날거라고, 경고해주었으면 좋았잖아.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이 관계를 바로잡아야할지 모르겠어. 본즈, 나는....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고개를 돌려 본즈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하면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일을 보상할 수 있을까? 아직은 고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곳이라면, 이 시간대에서라면. 이대로 미래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과거로 이동하는 조건이 내 죽음이라면 몇 번이라도 이 난간 밖으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사랑해, 레너드 맥코이. 너와 결혼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어."

본즈는 대답 대신 더 진한 키스로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키스를 이어가다가 결국 테라스를 나가 침대로 이동했다. 본즈가 먼저 누웠다. 나는 옷을 벗고 나신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평소와 같은 다정한 손길로 내 몸을 어루만졌다. 그의 오른손이 내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허리를 쓸고 허벅지 사이를 파고 들었다.

우리의 몸은 서로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것처럼 맞닿았다. 나는 본즈를, 본즈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만큼은 서로가 아니면 그 어떤 미래도 없다는 듯이 간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본즈를 알수록 그가 미워졌고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본즈는 어느 순간 갑자기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건 불가능해, 짐.' 그렇게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본즈를 끌어안았고 본즈 역시 내 어깨를 감싸며 침대 가운데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디 이 기억이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지기를 빌었다. 언젠가 그가 내 곁을 떠난다고 해도, 기억 속에서라도 언제든지 이 자리에 돌아갈 수 있기를....

"사랑해."

본즈가 말했다. 나는 본즈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

본즈는 내 턱을 만져서 내가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숨 쉬는 소리를 듣다가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삑—삑삑. 커뮤니케이터가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이곳이 호텔이 아니라 엔터프라이즈호 안인 것처럼 습관적으로 침대 밖에 손을 내밀었다. 탁상 위에 올려져있을 커뮤니케이터를 찾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그때 나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가는 감각을 느꼈다.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미래에 이동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짐."

본즈가 나를 불렀다.

"짐?"

아직은 안 돼.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

나는 본즈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갈등의 원인을 깨달으면 미래로 나아가게 되어있었나보다. 내가 손 닿을 수 없는 저 먼곳으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본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본즈, 기억해야 해! 나는....나는 달라졌어. 옛날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 그러니까 본즈..."

본즈는 이제는 낯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네가 정말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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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핫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