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레너드?"

누군가 본즈를 불렀다. 그 순간, 내가 집 근처 공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내가 지구에 있는 거지? 설마 또 시간을 건너 뛴 건가? 지금이 며칠이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앉아있는 벤치 때문에 내 위치를 파악했다는 게 우스웠다. 이 벤치는 공원에 있는 다른 벤치와 달리 떡갈나무로 만들어져있었는데, 가볍게 뛰다가 잠시 쉬어가던 자리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곳에서 휴식하기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힘들어? 그러면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자.' 본즈가 먼저 제안했다. 그때부터 이곳에 오면 자동적으로 앉아서 숨을 돌렸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앉아있는 이유는....옆에 본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내 예상대로 본즈가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었고 나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너 레너드 맥코이 맞지?"

누군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 강한 햇살이 쏟아져서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본즈는 일어나서 그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세상에,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 몇 년 만에 보는 거지?"
"적어도 10년은 되었을걸."

나는 빨쭘하게 계속 앉아있었다.

"인사해. 이쪽은 케빈이고...."

본즈는 잠시 멈칫했고 그 짧은 순간 묘한 긴장감이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옛날에 같은 연구를 했던 동료야."

그제야 이 순간이 기억났다. 이건....미래가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전의 과거였다. 우리가 이 공원에 있는 걸 보니 결혼한 다음 이라는 건 알겠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햇빛 속에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아니다. 저건 마스크가 아니다.

—삑.
—삑 —삑 —삑.

시끄럽군. 커뮤니케이터가 울리고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공원은 사라지고 낯선 하얀색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즈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하, 알겠다. 이건 꿈이야!

깨달은 순간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나는 침대 밖으로 손을 뻗어 서랍 위를 더듬었다. 간신히 커뮤니케이터가 잡아서 한 손으로 덮개를 열자, 드디어 삑삑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함장님. 서둘러 함교로 오셔야겠습니다."

스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음...무슨 일이야, 스팍?"
"우든호가 버려진 지역에 근접했습니다."
"알겠어. 금방 갈게."

나는 시계를 힐끔 보았다. 다행히 시간을 건너뛰지 않았다. 본즈와의 관계는 제대로 망쳤지만 말이다.

"젠장."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정말 기묘한 꿈이었다. 그날 공원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 대체 누구였는지 몰라도 꿈이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준비를 마친 뒤 함교로 향했는데, 터보리프트 안에서 본즈와 마주쳤다. 본즈는 내가 불편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나도 네가 불편하거든?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려고 하다가 본즈의 얼굴이 어쩐지 수척해보여서 그만뒀다. 나는 본즈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동자만 조용히 굴렸지만 그가 충분히 시선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랑 영원히 얘기하지 않을 거야?' 나는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문이 열리며 함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함교에 발을 딛자마자 체콥이 내가 왔음을 경쾌한 목소리로 알렸다.

"함장님, 이 이상 접근하면 방사능이 엔터프라이즈호를 손상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대는 가능하지?"

스팍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 우든호를 찍은 영상을 띄웠다. 우든호는 느긋하게 움직이는 소행성 사이에 있었고 몇 광년 떨어진 별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선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네."
"우리 함선은 우든호와 상당한 거리가 있으니까요."
"셔틀은 준비 되었어?"
"88% 정도입니다. 앞으로 6시간 내로 모든 준비가 끝날 것입니다."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러면 그 전까지 방호복을 입고 함선을 돌아다녀 볼까."
".....방호복을 입고 활동하는 훈련이 필요하나, 함선 내부를 돌아다니는 일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나는 팔꿈치로 스팍의 팔을 툭 쳤다. 스팍은 내가 지나치게 친밀하게 굴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나를 톡 쏘아보았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자식에게 메일이 또 왔어. 그런데 저장해놓으려니까 갑자기 사라지더라고."
"....함장님의 메일이 열린 서버를 전부 살펴보았지만 수상한 접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놓고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쨌든 수고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려는 그때 본즈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속닥거리는지는 몰라도 그만하고 화면에 표시된 방사능의 농도를 보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저곳에 뛰어들 예정인데 의사로서 어떤 소견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조금 딱딱한 투로 말하자 본즈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여기서 당장 떨어지라고 권하겠지."
"닥터 맥코이. 우리의 임무를 잊은 겁니까?"

스팍이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내가 따라가는 게 좋겠어."

나는 화들짝 놀라서 본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걱정 마. 너와 제이미와 함께 셔틀을 타고 갈 거지만 우든호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 셔틀에서 대기하면서 혹시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에 응급처치할 준비를 할게."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돼. 그곳에는 위험한 도적들이 있고 모든 일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일어나야만 해.

안 돼. 본즈, 안 돼.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돼!"

나는 패닉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함교 안의 모두가 나를 쳐다봤고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본즈였다.

"짐?"
"허가 못 해."

스팍은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함장님. 닥터 맥코이의 의견은 상당히 논리적입니다만. 어째서 허가하지 않는 겁니까?"

나는 스팍을 노려보다가 그와 본즈 두 사람에게 나를 따라 회의실로 오라고 명령했다. 본즈는 터보리프트에서부터 시작해 회의실로 가는 복도까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결국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에게 손목을 잡혀 자리에서 멈추었다.

"짐. 내 말 안 들려?"
"이거 놔."

본즈가 놓지 않자 나는 권위적으로 말을 이었다.

"이거 놓으세요, 닥터 맥코이. 명령입니다."

본즈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며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놨으니까 이제 말 해."
"....네가 이번 임무에 나서는 걸 허가하지 않을 거야."
"내 말은 그러는 이유가 뭔지 말하라는 거였어! 네가 이번 임무에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냈다며? 나는 그저 도우려고 한 거야. 그런데 어째서 나를 빼려고 안달이 난 건데? 정당한 사유도 없이."
"명..."
"또 명령이라고 말하기만 해 봐. 우리가 싸웠다고 나를 임무에서 뺀 건 아니잖아.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나는 네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스팍이 나와 본즈의 얼굴을 돌아가면서 흘금거리다가 조용히 문 앞으로 갔다. 패널을 만져서 회의실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본즈에게 말했다.

"닥터 맥코이. 두통이 느껴집니다."
"뭐?"
"두통이 느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즈는 스팍을 쳐다보며 눈으로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제게 가벼운 진동제를 처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뾰족귀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쩔 수 없이 메디베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 알잖아? 벌칸용은 따로 제조해야 하니까!"
"부탁드립니다."

본즈는 으으으, 하고 골치아픈 신음소리를 내더니 잠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 나와 스팍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와우, 벌칸이 거짓말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두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평소와 달리 통증을 이성으로 다스리지 않고 약물에 의존하기로 한 것뿐입니다."

스팍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닥터 맥코이가 이번 임무에 나서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습니다."
"....이번 임무는 위험하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그가 따라가야하는 것 아닙니까. 방사능이..."
"방사능 때문이 아니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통은 내가 너보다 심할 거다, 스팍.

"전에 이 임무를 나갔을 때...나는 거의 죽을 뻔했어. 도적들과 마주쳤거든."
"도적들이 우든호 안에 남아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여기서 정반대 방향에 함선을 세워놓고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왔다갔다하고 있지. 왜냐면 우든호 안에 전쟁 무기의 재료가 숨어있거든."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무슨 광물인데... 그걸 손에 넣으려고 지금도 애쓰는 중일 걸."
"그런 중대한 사실을 어째서 제게 말씀해주시지 않은 겁니까?"

나는 예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두 번 모두 폴라의 죽음으로 끝났던 비극적인 사건.

"나는 과거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똑같이 행동할 거야. 그러면 광물도 무사하고 나랑 제이미도 함선에 돌아올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조언은 듣고 싶지 않았어. 특히 너. 네 조언은 언제나 유용하고... 무언가 선택해야하는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네 말을 따르게 될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랬다가 미래가 바뀌면 안 되니까."

스팍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물론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굴리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나와 제이미가 죽거나 다쳐서 광물을 빼앗기게 된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정해진 미래로 향하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함장님의 말씀대로 맥코이가 셔틀에 승선하지 않는 게 현명한 판단일 것 같군요. 그리고....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스팍은 들고 있던 패드를 내 앞에 내밀었다.

"닥터 맥코이가 가상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이유는 전에없던 신약을 제조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전제로 닥터 맥코이가 작성한 논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그의 관심사이다. 둘째, 관심을 가졌다면 이미 옛날에 한 번 연구를 진행했을 것이다. 이건 스타플릿 학술논문 아카이브에 등록된 논문과 개인 연구 기록이고...."

그는 화면을 손으로 쓸어가며 논문과 연구의 제목을 보여주었다.

"이게 무슨 논문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아무튼 이걸 볼 생각을 하다니 역시 스팍이야."
"저는 함장님이 이 기록을 먼저 살펴볼 생각을 하시지 않았다는 게 더 놀랍군요."
"칭찬하자마자 정떨어지게 하는 것도 너답다."
"보시다시피 아카이브에 등록된 것 중에는 비밀리에 진행할만한 연구가 없습니다. 저는 그가 스타플릿에 오기 전 연구한 게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또 다른 논문과 대학교에서 발행된 학술지가 나열되었다. 오래 전에 쓴 것들인데도 평가 점수가 상위에 속했다. 새삼 본즈가 얼마나 대단한 의사인지 실감이 났다.

"짐작가는 게 있으십니까."

그때 학술지에 실린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손으로 가리키자 스팍이 천천히 제목을 읽었다.

"....굳은 폐세포를 살리다."

스팍은 어째서 이걸 선택했냐는 듯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제목을 보고 고르지 않았다. 저자를 보고 골랐지.

"공동 연구자 케빈 필립스....."
"아는 인물입니까?"

그때 본즈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본즈는 거친 걸음걸이로 스팍에게 다가갔다. 하이포를 놓으려는 순간, 스팍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즈를 피했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닥터 맥코이. 저는 벌칸입니다. 이성으로 통증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부탁한 건데!!!"
"그 사실을 방금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수고에 감사하지만, 더 이상 약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본즈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이글거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스팍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이번 임무에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는 함장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본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웃기지 마."
"본즈."
"짐. 왜 이러는지 말 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면 그냥 물러날 테니까."
"네가 필요하지 않아. 그뿐이야."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본즈는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가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주기를 바라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감정을 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전부 설명할게. 지금은 나를 믿어주면 안 될까?"

본즈는 가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무표정으로 돌아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제이미도 내 생각에 동의할 걸?"

그가 내뱉는 모진 말에 상처받는 내 자신이 싫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욱하고 올라왔다. 그게 진실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면서 말이다.

"짐,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이러는 이유가 뭔지 말해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 많은 말을 뒤로하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메디베이로 돌아가."

본즈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을 마주치는 게 괴로워서 고개를 돌리자 그가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함장님. 어째서 닥터 맥코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겁니까? 그가 당신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돌아온 이후로 내가 두려워한 일은 단 하나야. 본즈를 잃는 거. 사실대로 말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즈가 나서지 않게 막을 수는 없을걸. 너는 우후라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할래? 그녀가 위험한 장소로 가면서 끼어들지 말라고 하면 그럴거야?"

스팍은 침묵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했다는, 긍정의 침묵이었다.

"본즈가 위험해질 바엔 그냥 내가 오해를 사는 게 나아."




23.



임무까지 앞으로 두 시간. 나는 방호복에 적응하는 훈련을 끝내고 메디베이로 갔다. 채플이 나보다 먼저 와있던 제이미에게 하이포를 놓고 있었다. 그의 몸에 일시적으로 방사능 저항력을 높여주는 약물이 흐르고, 나도 같은 약물을 맞기 위해 옆으로 가서 기다렸다.

채플은 본즈의 연구실을 힐끔거렸다. 내가 온 걸 모른척하고 연구실에 틀어박힌 본즈라니, 아무리 눈치가 빠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본즈와 내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제이미가 말했다.

"나 때문에 싸운 게 아니라고 해줘."

채플은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다른 할 일이 있는 건지 내 팔에 하이포를 놓자마자 정리할 게 있다며 다른 곳으로 갔다.

"...30분 동안 여기 있으래. 약물이 체내에 고르게 퍼졌는지 확인해야하니까.....채플 말로는 그래."
"네가 아니라 채플이 말해주어야 할 사항인 것 같은데."
"실은 내가 채플에게 5분만 자리를 피해달라고 부탁했어. 너랑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야."
"쓸데없는 짓 좀 하지마."
"제임스. 우리 긴장 좀 풀면 안 될까? 이런 상태로 어떻게 임무를 수행해?"

짜증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메디베이 구석에 있는 진료대기 의자를 가리켰다.

"저기 좀 앉자."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제이미."
"응."
"과거에 내가 너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해. 그때 우리가 평소와 똑같이 사소한 다툼으로 헤어졌다는 거 알아. 그게 정말로 헤어졌다는 의미가 아닌 것도. 하지만 우리가 멀어진 동안 나는 본즈를 만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 그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야.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본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본즈가 나랑 헤어지고 싶어한대도 매달릴 거야. 네가 분풀이할 상대는 본즈가 아니라 나라고, 제이미."

제이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징계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렇겠지."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0분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던가. 나는 다른 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제이미가 물었다. 그는 내가 본즈에게 갈거라고 추측했는지 본즈가 연구실 안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내가 처음에 왔을 때는 연구실 문이 열려 있었거든."
"...혹시 컴퓨터 화면에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봤어?"
"바로 문을 닫아서 잘 모르겠어."
"문을 열면 바로 화면이 보이는데 조금이라도 봤을 거 아니야."
"음....DNA 배열 같은 그림이 수십 개가 나열되어 있었고...아래에 글씨가 쓰여있었는데 거기까지는 기억이 안 나."

DNA 배열이라고?.... 본즈가 만드려고 하는 약은 DNA에 영향을 미치는 건가?

나는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겨 채플을 찾아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어디 불편한 게 있냐고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 DNA 자체에 문제가 발생하는 병이 뭐가 있지?"
"아무래도 유전병이 대표적이겠죠. 그리고 바이러스도 있네요."

유전병 아니면 바이러스라. 본즈가 연구하는 것은 어느쪽일까?

나는 채플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연구실 앞으로 갔다. 그의 이름을 부른 다음 문에 몸을 살짝 기대고 말했다.

"아까는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 없어."

계속 연구실에 틀어박혀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본즈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살짝 휘청거리다가 똑바로 섰다.

"뭐라고?"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제독님께 대신 허가 받았으니까. 나도 우든호로 향하는 셔틀을 타기로 협의 했어."

본즈는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컴퓨터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슌 제독. 바로 이번 임무를 지시한 인물로, 자신이 함장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해서 함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걸 좋아했다. 그게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참견이라서 함장이 가장 기피하는 제독으로 유명했다.

(사실 이번 임무에도 이것저것 참견했었다. 단지 이번에는 그가 참견하기 전에 내가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냈을 뿐.)

비록 멈춰진 영상이었으나 화면 중간에 숫자와 통화 종료라고 쓰인 글씨가 있는 것을 보면 본즈는 방금 전까지 그와 통화했던 게 분명했다.

"너.....슌 제독과 통화한 거야? 나를 대신해 허가를 받으려고?"
"그래."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나한테 화가 났다지만 그래도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맥코이 소령, 내 명령에 따르지 않기 위해 슌 제독님께 연락했다는 건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본즈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가 막혔다. 함선의 CMO가 함장의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슌 제독은 참견을 좋아하는 머저리라 그랬다고 쳐도 본즈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함장에게 이럴 수는 없으니까.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제독님께 연락드릴 거면, 적어도 직속 상관한테 먼저 '제독님의 의견을 듣고 싶으니 연락하겠다'고 알리는 게 예의라고 보는데."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함장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지금은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허가를 받았다고 해도 네가 내 명령을 듣기로 결정하면 그만이야. 어쨌든 이번 임무는 엔터프라이즈호가 맡은 거고, 내가 지휘하고 있으니..."

본즈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나는 셔틀에 탈 거야. 너와 제이미의 안전을 위해서."
"맥코이."
"왜 말리는 건데! 평소에는 가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 데려가다더니 이번에는 왜 밀어내는데?"
"....너는 아무것도 몰라!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의사인 내가 따라 가야지. 너는 항상...."

본즈의 손이 살짝 움찔거렸다. 나를 만지려고 했던 것 같지만 끝까지 손대지 않았다.

그는 나를 지나쳐 채플에게로 갔다. 자신도 하이포를 맞아야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본즈를 지키고 싶어서 했던 선택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속수무책으로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메일이 옳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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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핫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