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12시, 집 앞에서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의 어두운 곳까지 빛이 닿아 눈꺼풀에 힘을 주어 꽉 감아도 여전히 밝았다.


"왜 눈을 감고 있어?"


데니스가 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으며 말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창밖을 보았다. 역시나 늘 보던 익숙한 풍경. 길게 이어지는 집 사이로 보이는 골목과 살짝 달궈진 아스팔트 길.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그냥은 무슨. 너 요즘에 만난다는 그 놈때문에 그래?"


데니스를 만나는 건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가장 친한친구이자,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녀석은 알파라는 것 뿐. 만약 재커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아마도 데니스와 사귀게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우리가 알고지낸 시간은 무려 5년이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시기가 매번 달랐다.

 

가장 먼저 호감을 느낀 건 바로 나였는데-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가 첫사랑인 것 같다-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고백했다. 그는 고민하려는 기색도 없이 나를 찼다. 우리는 친구야, 라면서.


나는 친구로라도 있고 싶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친구야. 단호한 태도 덕분에 나는 마음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완전히 잊은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데니스는 뜬금없이 말했다. 크리스, 난 아무래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이미 마음정리를 끝낸 상태였기에 나는 고민하는 척도 안하고 그를 찼다. 우리는 친구인 것 같아, 라고. 그래- 나도 안다. 조금 유치했던 것. 그런데 그렇게 차고 나니까 없던 미련이 생기고, 눈길도 더 가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날 좋아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 결국 다시 감정이 생겼다.


다시 고백했으나 차였다. 다음엔 데니스가 고백했다. 나는 데니스를 거절했다. 그것의 반복이었는데 그럼에도 관계가 이어진 이유는 단순히


"할래?"


이 놈이랑 속궁합이 무지하게 잘 맞기 때문이다. 좋아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그 중 하나는 분명 이 부분이다.


"싫어."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데니스는 큭큭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으음, 이 카페는 정말 커피가 맛없어."

"그럼 왜 자꾸 여기서 마시는데."

"커피가 싸잖아. 커피값도 아끼고, 네 얼굴도 보고."

"끼부리지마."

"뭐, 그것보다."


그는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 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쩔거야? 그 관계."

"나도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빨리 마음 정리해. 그냥 친구로서 모든 감정빼고 현명하게 충고하는 거야. 그 관계가 얼마나 더 갈 것 같은데?"

"하지만."


하지만 나는 재커리가 좋은 걸. 정말, 정말로 너무 좋은 걸. 귓가에 부드럽게 울리는 낮은 톤의 목소리도, 평소엔 엄청 단정하다가도 일 쉬는 날이면 약간 풀어지는 머리카락도, 가끔씩 편안한 쇼파에 누운 것처럼 내 어깨에 기대다 어느새 잠이드는 것도.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거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재커리에게 얼마나 빠져있는지 깨달았다. 아아,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구나.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코끝이 찡해졌다.


"어, 야. 울지마."


데니스는 미안한 말투로 말했다. 

 

"미안."


눈물은 가까스로 다시 들어갔지만 시무룩한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크리스, 울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알잖아 나는 립서비스 못하는 거.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더더욱 못하겠어. 재커리는 확실히 좋은 녀석이야. 하지만 그게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의 말이 백번이고 옳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머릿속의 대부분이 그 생각밖에 없고-요즘엔 종종 재커리가 더 차지하지만-내 일을 사랑한다. 쾌락을 느끼며 돈까지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지금까지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왔는데 재커리 앞에만 서면 거짓말이 툭 튀어나온다.


내 직업은 좋지만, 그걸 숨기는 내 자신은 너무나도 부끄럽다.

 

 


다음날 다시 낮 12시.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차에서 막 내린 재커리가 보였다. 그는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고 나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일이-제인이 보낸 알파가, 그러니까, 알잖아?-생긴 이후 재커리는 나를 칼같이 데리러오고 집에 데려다준다.


덕분에 거짓말이 더 늘었다. 재커리는 내가 그간 집에 잘 들어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와 헤어지고 집을 빠져나와 일을 하러 가곤했다. 제약회사 직원이 새벽에 일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문을 열고 차를 타니 차 안에서 재커리의 향수냄새가 났다. 예전에 그 향수가 내가 좋아하는 향수라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더니 그때 이후로 매일 뿌리고 다닌다. 난 이런 재커리의 새심한 점이 좋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을 위로 잡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러면 출발을 못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며 오늘은 여기서 하루 종일 있을까? 하고 말했다. 목을 뻗어 볼에 입을 맞췄다.


"안전벨트나 매세요."          

"안 돼. 그럼 너한테 키스 못하잖아."

"도착하면 많이 할테니까 잠깐만 참아."

"싫은데."


나는 아예 몸을 일으켜 재커리에게 기대 입을 맞췄다. 처음엔 이제 그만 가야지, 라고 말하며 밀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내 옷을 당기며 확 끌어안아 버린다. 나는 자연스럽게 의자 밑으로 손을 뻗어 그의 의자를 뒤로 넘겼고, 우리는 마치 침대 위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탐했다. 점점 더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내 허벅지가 그의 허벅지에 쓸리며 기분이 더욱 야릇해진다.


흐으으, 간신히 참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신음소리가 나올 것 같다. 재커리 역시 달아오른 듯 살짝 붉어진 뺨을 하고 내 몸을 더듬었다. 옷 안으로 손이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드디어? 드디어 하는거야 재커리?


하지만 재커리는 금세 손을 빼고 나를 밀어내며 말했다.

 

"미안."


내가 몸을 움찔한 것 때문에 거부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인걸까. 아냐, 계속해도 괜찮아- 라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듯 했다. 나를 의자에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직접 매주는데 몸이 또 밀착하게 되어 참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향수냄새와 섞인 알파의 냄새는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마음을 정리해야하는데, 그와 자고 싶은 욕구만 커저가다니 나원 참. 의외로 관계를 가져보면 별로 일지도 몰라. 재커리가 나와 자지 않는 이유도 사실 엄청 서투르다던가, 이상한 취미가 있다던가. 그렇게 마음 속으로 그를 열심히 깎아 내리지만 결국엔 어찌되었든 단 한번만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잭."

"응?"

"궁금한게 있는데."

"응."

"왜 나랑 안해?"

"뭘?"

"그거."

"그거?"

"아까 하려던 거."

 

재커리는 핸들을 꺾으며 인도 쪽으로 차를 급정거했다. 갑자기 멈춘 것보다 끼이익하고 타이어가 쓸리는 소리에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재커리는 곧바로 몸을 돌려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당황한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 놀랐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웃었다. 재커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크리스."

"응?"

"나는 너와 하고 싶지 않은건 당연히 아니야."

"응."

"하지만 그건 그렇게 가볍게 할만한 것은 아니잖아. 넌 오메가니 베타에 비해 임신도 쉽게 되고. 네가 몸에 안좋은 피임약을 먹는 건 정말 싫어.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쉽게 관계를 가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좀 더 특별한 순간에 하고 싶어."

 

나 임신을 못하는데. 그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예전에 함께 거리를 걷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의 옆으로 유모차를 끄는 부부가 지나갔는데, 유모차 속 아기를 보며 재커리가 말했다. 결혼하면 저렇게 귀여운 아기를 낳고 싶어. 그때 즐거워보이는 재커리의 표정이란. 재커리는 분명 다정하고 멋진 아빠가 되겠지. 틀림없이 나보다 훨씬 친하게 지낼겠고. 재커리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는 아이는 재커리처럼 사랑스럽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너무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임신 조차 불가능하다. 일을 하면서 나의 가장 장점이자 강점이라고 여겼던 것이 재커리의 앞에만 서면 엄청난 약점이 되어버린다. 재커리를 사랑하지만,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내 자신에 대해 회의감만 들었다. 스스로를 부정한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내가 지금껏 잘못 생각하며 살고 있었던 걸까? 쾌락을 즐기는 게 나쁜건가? 그게, 그게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지는 나는..

 

"크리스?"


안색이 갑자기 안좋아보여. 어디아파? 재커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밝게 빛나보인다. 


'재커리는 확실히 좋은 녀석이야. 하지만 그게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잖아.'


데니스의 말이 머리에서 울린다. 그의 말은 정말 옳다. 나와 재커리는 영화 취향도, 입맛도, 성격도 모든게 다 맞지만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다른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전 애인과 헤어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사실을 밝히면 그에게 같은 상처를 주는 셈이 되는거겠지.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차라리 그를 몰랐으면 좋았을 걸. 모든 것의 시작은 사소하다 여긴 내 버릇과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말.

 

"잭."

"응?"

"재커리..."


내가 너무나도 좋아한 사람의 이름- 재커리 퀸토.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나는 이 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우리 헤어지자."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뱉은 거짓말처럼 쉽게 이별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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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핫파이